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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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용어인 '회색 코뿔소'는 멀리서도 눈에 잘 띄어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간과하기 쉬운 위험을 뜻한다. 미국의 정책분석가 미셸 부커 전 세계정책연구소장이 2013년 세계경제포럼(WEF) 연례회의인 다보스 포럼에서 처음 사용해 전 세계에 통용됐다. 최근 '회색 코뿔소'의 공격 가능성에 한국 경제가 노출돼 있음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고금리와 경기 침체,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 문제로 유동성 위기에 몰린 국내 중견·중소 건설사가 가장 먼저 타깃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일각에서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는 '4월 위기설'의 현실화다. 

지난해 말 태영건설(16위)의 워크아웃 이후 100위권 건설사들이 하나둘씩 법정관리에 돌입했다. 문제는 총선이 마무리되고 건설사들의 외부감사 보고서가 본격적으로 공개되는 4월 이후다. 부실을 감추지 못한 많은 중견 건설사들이 잇달아 법정관리를 신청할 것이라는 풍문이 나도는 가운데, 최근 입수한 '4월 법정관리 건설사 17곳 리스트'를 살펴보면 16곳이 시공능력평가 20위 안에 들지 못한 중견·중소 건설사들이다. 업계에선 "4월 위기설은 과장이 아니다"라며 "10위권에 속하지 못한 중견사들은 물론, 규모가 훨씬 작은 중소 건설사들은 대개 회사채를 발행하거나 다른 계열사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 굉장히 어려운 상태"라고 우려했다.

전국적으로 미분양이 늘어나고 있는 점도 4월 위기설을 부추긴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전국 미분양 물량은 올해 1월 6만2489가구로, 지난해 11월 5만7925가구에서 2개월 만에 4564가구(7.9%) 늘어났다. 특히 지방의 미분양이 심각한 것으로 파악된다. 대구가 1만245여 가구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고, 뒤를 이어 경북(8800가구), 충남(5436가구), 강원(3996가구) 순으로 미분양 물량이 적체된 것으로 집계됐다. 최근 몇 년 동안 중견·중소 건설사가 지방 사업에 많이 뛰어들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한계에 처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달 한국경제인협회가 매출 500대 건설기업 102곳을 대상으로 이자 비용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봐도 상황은 심각하다. 응답기업의 76.4%가 '현재 기준금리 수준(3.5%)에서 이미 임계치를 넘었다'고 답했다. '여유가 있다'고 답한 비율은 17.7%에 불과했다. 금융당국은 이러한 시장 위기론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총선 이후 부동산 PF가 터진다는 것은 큰 오해"라며 "부동산 PF는 상당수 정리되는 중이고, 정부가 잘 관리해서 PF가 질서 있게 정리되는 모습을 보인다.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지난해 말 내놓은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기업대출·채권 등 빚이 크게 늘면서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기업신용 비율(레버리지)은 지난해 상반기 말 기준 124.0%를 기록했다. 역대 최고 수준이다. 특히 부동산업 대출 레버리지는 지난해 3분기 기준 무려 308.6%에 달한다. 높게 쌓인 부채는 언제든 한국 경제의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럴수록 정부의 결단이 필요하다. 부실기업은 과감히 정리하고, 회생 가능성이 높은 건설사는 적기에 유동성을 공급해줄 수 있는 지원 방안이 필요하다. 앞으로 다가올 위기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이미 알려진 요인들로 인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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